국어교육과 염창권 교수 홈페이지 입니다.
http://202.31.152.13/myhome/yom
로그인 |  가입신청 | 
2019.7.18 (목) 프로필 공지사항 현대문학강독 대학원강의 갤러리 즐겨찾기

염창권

    갤러리

   2019. 07   
 
     


갤러리
제 목
 시조 <부푸는 건반> - 이민아
작성자
 yom
 조회 : 755
 작성일 : 2010/09/28 09:03
첨부파일1
  DSC_00180003[1].jpg(145kb)

사진: 비타포엠


[내가 읽은 이 달의 작품]- 시조(현대시학 2008년 6월호)


부푸는 건반

            이민아



집 떠나 대학 다니는 동생 녀석 집에 오는 날
지하철 야간공사장
아르바이트 땀 밴 옷에
볕 좋은 공동수돗가 빨랫감으로 성황이다

절망이 절망에 맞설 때 꺾인 손목 다시 펴고
도비*의 운명을 살듯
때 절은 옷 씻던 모친
해 저문 아무나 강江가, 저 환한 타즈 마할

담장 아래 바지랑대 하늘로 치세운다
부푸는
생의 건반
스타카토로 치는 바람
내 안의 허명 깨치며 춤추는 몸의 건반

* 도비: 인도의 세탁부
<시조월드> 상반기호

------------------------------------------------------------------
평론


                 텍스트들, 몸 바꿔 입기

                               염창권


1.
시조단이 활성화되고 있다. 시조의 발표 지면이 늘어나고 있고, 발표된 작품을 선별하고 해설을 붙이는 평단도 활성화되고 있다. 좋은 시조 작품에는, 해설이 따르고 문학상을 통해서 가치부여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미 정형률이 가진 표현의 제약을 넘어서서 시적 성취가 두드러지는 분들의 작품은 어김없이 월평이나 계간평에 올라 있다.
이 지점에서 한 편의 시조를 선택하여 읽는 일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우선적으로 평자가 가지고 있는 비평적 관점이 뚜렷해야 하고, 시조라는 정형 양식에 맞는 타당성 있는 독법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은 험난하다.

2.
줄리아 크리스테바에 의하면, 텍스트의 내부에는 그 이전 시대나 동시대의 다른 텍스트들이 뒤섞여 있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어떤 텍스트라도 전적으로 개인적인 수 없고, 완전한 원전(原典) 역할을 하는 제1차 텍스트로 존재한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더구나 정형시로서 시조의 경우는 율격적 자질만 해도, 구조(structure)나 결(texture)의 운용에 있어서 상호교섭적인 경험을 가지고 있게 마련이다. 시조에서 율격이 관습으로 정형화되어 있기 때문에, 시인은 이 자질 내에서 의미적 변주를 통해 텍스트 자체의 의미 구조나 결을 새롭게 생성해 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다양한 많은 것들의 교차와 상생을 통해서만 좋은 시조를 생산해 낼 수가 있는 것이다.
현 시대에 이르러 텍스트는 문자성에 기반을 둔 <원문(原文)>이라는 개념을 넘어서 다양한 방식으로 호칭되는 낱말(기호적 장치)이다. 즉 문자성을 넘어서서, 얼마든지 세컨드 네임을 붙일 수가 있다. 이를테면 몸 텍스트, 나무 텍스트, FTA나 북미 핵협상 텍스트, 김기덕의 영화 텍스트 등 다양한 방식으로 텍스트를 호칭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내 몸도 물질성에 기반을 둔 하나의 텍스트이고, <도비>라는 인도에서 세탁 일을 하는 계층도 사회․문화적 텍스트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이처럼 대상을 지시하기 위한 기호적 장치로 텍스트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우리의 인식적 노력의 소산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방책이다. 어떤 대상을 인식하고자 할 때 대상은 그가 가진 텍스트 자질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응답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대상을 불러 놓고 망연히 시간을 보낼 수는 없다. 독자인 나의 과업은 텍스트를 호명하여 그들의 반향을 이끌어내면서 대상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내 나름의 텍스트 결과물을 새롭게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이다.
이민아의 「부푸는 건반」은 몸 텍스트의 다양한 변주를 보여준다. <땀 밴 옷>은 도시에서 힘겹게 학업을 영위하는 동생에 대한 환유물이고, 세탁 일을 하시는 모친의 굽은 등은 <타즈 마할> 궁전으로 성스럽게 자리바꿈을 한다.

집 떠나 대학 다니는 동생 녀석 집에 오는 날
지하철 야간공사장
아르바이트 땀 밴 옷에
볕 좋은 공동수돗가 빨랫감으로 성황이다

절망이 절망에 맞설 때 꺾인 손목 다시 펴고
도비*의 운명을 살듯
때 절은 옷 씻던 모친
해 저문 아무나 강江가, 저 환한 타즈 마할

담장 아래 바지랑대 하늘로 치세운다
부푸는
생의 건반
스타카토로 치는 바람
내 안의 허명 깨치며 춤추는 몸의 건반

* 도비: 인도의 세탁부
---이민아,「부푸는 건반」 전문

이 시조의 발상은 동생의 <때 절은 옷 씻던 모친>으로부터 촉발된다. 시인은 인도의 <도비>라는 최하층 계급의 세탁부를 불러내어, 비천한 신분의 일이 성스러운 모성적 행위로 이전될 수 있도록 사물성에 기반을 두고 상상력을 펼쳐간다.
「부푸는 건반」은 모두 세 수로 된 연시조이다. 첫째 수는 세탁물을 만드는 아르바이트생인 동생의 문제이고, 둘째 수는 동생의 옷을 빨래하는 어머니의 성스러운 모습이다. 셋째 수는 앞의 두 수와의 인과에 의하여 옷을 빨랫줄에 널면서 내 몸으로 이전된 빨래의 시간이 될 터이다. 전체적인 의미망으로 보아 각 수는 단형시조에서 초․중․종장의 역할을 순차적으로 분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는 동생이 가지고 온 세탁물에 대한 인식과 함께 시작한다. 집을 떠나 대학을 다니는 동생은 실상 그 학업이 만만치 않다. <지하철 야간공사장>이라는 ‘낮에 공부하고 밤에 일하는(주독야경)’의 고행을 감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흔적은 고스란히 <땀 밴 옷에> 남아 있고, 집에 돌아올 때마다 이 격통의 보따리를 풀어 놓는다. 그런 날 중에 <볕 좋은> 날을 만나면 다행이다. 망설일 것 없이 공동수돗가에서 어머니는 빨래를 하신다.
일상화된 세탁기가 아닌 몸으로 손빨래를 한다는 점에서, 그 모습은 둘째 수에서 <도비>의 숙명적인 과업에 비견된다. 왜냐하면 아들의 고생이 어머니의 계층적 기반에서 비롯된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업보는 아들의 업보의 일부로 이전되기도 한다. <도비>는 인도의 최하층 계급으로 세탁 일에 종사하는 부류의 명칭이다. 이 직업은 세습되면서 숙명적으로 더럽고 냄새나는 옷들을 깨끗이 세탁하여 돌려주는 일을 도맡아해야 한다. 그러므로 도비의 세탁하는 세속적인 일과 왕비의 무덤인 <타즈 마할>의 호화로운 건축 양식은 상호 극명하게 대조된다. 그런데 시인은 이 둘을 하나의 텍스트로 결합시킨다.
빨래하는 어머니는, ‘삶은 고행을 통해서 완성된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꺾인 손목을 펴주고 때 절은 옷을 다시 말갛게 우려낸다. 이 모습을 지켜보는 시인은 마침내 종장에 이르러 <해 저문 아무나 강江가, 저 환한 타즈 마할>로 비유하면서, 어머니의 둥글게 구부린 왜소한 몸을 눈부신 궁전의 형상으로 환치한다. 가장 세속적인 모습에서 가장 성스러운 장면으로 전환시키는 힘은 아름다움이 결코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에 있다는 의미 부여이다. 이런 점에서, <바람의 한 가운데에 빨래를 내 거는 어머니의 왜소한 몸, 눈부시다.>고 시작노트에서 밝히고 있는 시인의 태도는 건강하며 정당하게 읽혀진다. 이는 시인이 어머니의 고행을 보는 눈이 따뜻하기 때문이다. 슬픈 긍정의 힘이라 할 만하다.
셋째 수에서는 세속의 남루와 고행을 말갛게 비워낸 옷가지들이 하늘에 내걸린다. 제목이 으로 제시한 <부푸는 건반>은 하늘 아래 내어 걸려 있고, 바람이 건반 삼아 그걸 건드리고 가면서 <내 안의 허명을 깨치게> 된다는 것이다. 생의 건반처럼 하늘에 내걸린 옷가지들을 바람이 건드리고 가면서 생은 중력에서 벗어나 점점 가벼워진다. 때 절고 축축했던 무거운 일상들은 어머니의 빨래하는 일에 의해 모두 치유되고, 하늘 아래 내어 걸림으로써 새로운 생성의 시간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므로 동생은 다시 원기를 회복하여 생생한 생의 현장으로 진입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이상으로 「부푸는 건반」이 가지는 의미의 호응과 세부적인 결을 살펴보았다. 이 시는  공동수돗가의 어머니의 빨래 모습을 <도비>의 세탁일과 같은 숙명적 업보로 비유하면서, 그 안에서 세속적인 것을 넘어서는 신성한 힘을 찾아내고 있다. 한편의 시 속에 동생과 어머니 그리고 그걸 바라보는 나로 이어지는 연쇄적 몸 바꾸기가 이루어지고 있다. 각각의 몸 텍스트는 상호 유사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

3.
필자는 최승범의 작품 세계를 논하는 자리에서, 시조의 3장 6구설과 3장 8구설이 갖는 의미 전개 양상에 주목한 바 있다. 여기서 그 중 일부를 재론하기로 한다.
시조의 형식을 3장 6구로 볼 때, 초․중장에서 대상 세계를 병렬적으로 인식하는 과정을 거친 다음, 종장에서 접속하여 종결짓는 방식으로 의미 구조를 형성하게 된다. 즉, 종장의 역할은 의미부를 전환시키면서 종결시키는 부분이다.
그런데 3장 8구로 형식 개념을 인식하게 되면 종장의 역할이 달라진다. 이 경우는 의미를 전환하고 종결짓는 단위가 종장의 3~4음보에 집중하게 되므로, 뒤로 갈수록 호흡이 급박해 질 수밖에 없다. 관조를 통한 대상 파악의 시간이 길어지게 되고, 이로서 자연히 대상 세계의 질서가 전면에 두드러지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이는 대상 세계에 대한 심화된 인식을 가능하게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시적 자아가 대상 세계에 역으로 몰입하는 경험을 가져오게 됨으로써 시에 있어서 자아의 정서 표현보다는 세계에 대한 성찰이 우선시 되는 교술적 특성으로 나타나게 된다.

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이시랴(정몽주 「단심가」 종장)
②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양사언 「태산이 높다하되」 종장)

위의 두 편 시조에서 종장 처리 방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①의 경우는 초․중장의 자아가 지향하는 세계의 심화를 거쳐, 종장 1, 2 음보에서 심의를 드러내면서 의미 전환을 가져온다, 최종적으로 종장의 3, 4 음보에 이르러 주제를 표출한다. “나는 결코 변할 수 없을 것이다.(가실 줄이/ 이시랴)”는 것이 이 시조의 주제이다. 전체적으로 3장 6구형에 맞는 의미 전개라고 하겠다. 반면에 ②의 경우는, “태산이 높아도 못 오를리 없다.”의 초․중장의 의미부, “그런데 사람들이 아니 오른다.”의 종장 1, 2 음보의 전환부가 논리적으로 연결된다. 즉 자아 정향의 심화가 아니라 대상 세계의 관찰과 성찰 과정의 병렬적 심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최종적으로 종장의 3, 4음보에서 사람들은 “뫼만 높다 하더라”가 의미의 중심이 되는데, 지레 겁먹고 포기하는 사람들의 행태를 비판하고, 말보다는 성실한 행동을 앞세울 것을 요구하는 교훈적인 시이다. ②의 경우는 3장 8구에 어울리는 의미 전개라 하겠다.
이상과 같은 필자의 논리가 견강부회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현대시조에서는 가곡의 가락에 근거를 두고 형식을 살피기보다는, 창조적 계승이라는 측면에서 텍스트 내의 의미 호응 관계에 중점을 두고 형식을 살펴야 한다고 본다. 계속해서 시험 삼아 제기해 보기로 한다.
먼저 자아의 정서적 표출이 두드러진 시조는 아래와 같은 3장 6구형의 의미전개 방식이 적절하다고 본다.

초․중장(2장 4구): 대상 세계의 인식 및 자아의 정서적 긴장 표출
→ 종장 1구: 정서가 요구하는 심의 표현(초․중장에서 의미 전환)
→ 종장 2구: 종결, 의미 확정

위와는 달리, 대상 세계에 대한 관조와 성찰이 두드러진 시조는 3장 8구형의 의미전개 방식이 적절하다고 본다.

초․중장(2장 4구): 대상 세계의 인식 및 관조, 성찰
→ 종장 1, 2구: 대상 세계와 자아의 조응(초․중장과의 호응 및 심화)
→ 종장 3, 4구: 종결, 의미 확정

여기서 중요한 것은 “3장 6구”가 옳으냐, “3장 8구”가 옳으냐 하는 선택적인 장면이 아니라고 본다. 이들 형식적 장치가 어떻게 의미 전개와 상호적으로 관련되느냐, 의미와 형식이 얼마나 유기적으로 연결되느냐 하는 인식의 여부가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적어도 정형시를 쓰는 시조시인이라면, 형식이라는 외재적 장치가 시상을 구속하는 수준이 아닌, 시상전개의 방법적 차원에서 자연스럽게 형식적 문법(grammar)이 동원될 수 있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4.
위에서 시조의 형식에 대하여 구차스럽게 재론한 이유는, 시조 시인들의 각자가 가진 지향이 어떻든 간에 최근의 시적 경향에 있어서, 3장 8구형의 의미전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보기 때문, 다시 말하면 발표된 시조의 많은 수가 시상전개에 있어서 3장 8구형에 부합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는 필자가 일정 부분만 책임지고 할 수 있는 말이다.
이민아의 「부푸는 건반」은 3장 6구형으로 읽을 수 있다. 특히 각 수의 종장에서 의미가 급속하게 전환되면서, 초․중장과 종장이 병렬적으로 대비되면서 의미를 심화시킨다. 이점은 이 시조가 가진 장점이다. 그러나 이 시조 또한, 자아가 대상 세계에 온전히 몰입하여 일체화된 경지라고 보기는 어렵다. 즉 동생이나 어머니의 이야기보다도 시적 자아인 나의 이야기가 차지하는 비중을 높여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즉 빨래가 마르는 가벼움의 이미지를 <부푸는 건반>으로 은유한 것은 평가할 수 있으나, 그 이전 단계에서 빨랫감이 가진 세부적인 결(부피, 질감 등)을 자아 정향으로 일체화시키지 못한 점은 이 시조의 미흡함이라 하겠다.
관조와 여백은 시조의 오래된 전통으로 작용해 왔다. 그러나 대상을 바라보고 그 안에서 질서를 찾아내어 “~싶습니다.”, “~바라봅니다.”, “~인 듯 뜨거워집니다.”, “~인 까닭입니다.”와 같은 언술이 반복적으로 사용될 때, 시적 자아는 실종되고 대상에 대한 존중감, 더 심하게 말하면 굴복만 남게 된다. 시적 대상에 대한 지나친 ‘거리두기’나 시적 대상을 너무도 사랑하고 존중한 나머지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시조의 전통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말이다. 물론 이와 같은 추구가 전적으로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시인 각자가 지닌 창작 스타일에 따라 대상 지향의 심화는 얼마든지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추구가 시조 일반의 유형으로 작용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생각이다.
시조의 형식(율격)은 시인이나 독자가 관습적으로 용인하고 사용하는 약속이다. 이 형식을 사용했다고 해서 시조가 모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형식을 사용하는 것은 시조 시인의 특장이 아니라 기본으로 갖추어야 할 자질이 아닐까 한다. 형식 내에서 의미적 변주, ‘몸 바꿔 입기’, ‘몸 겹치기’ 등의 창작의 방법을 제안하는 까닭이다. ‘시조도 시의 입장에서 성취되어야 한다.’는 말도 이와 연결된다.
다음 시조를 통해서 발상의 측면을 언급하기로 한다.

더러는 이도 빠진 옹기첩을 들여 놓고 살팍진 엉덩이를 무시로 쓰다듬나니, 아무도 눈치 못 채는 通淫의 이 눈부신 발효!

채워도 채워도 끝내 차지 않는 허기 때문에 독들은 하나 같이 입을 벌린 채로다

게으른 욕망의 곡선이 둔부를 타고 내린다
---박기섭,「독 있는 풍경」전문(나래시조, 봄호)

이 시조에서 시인은 대상인 <독>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독>으로 비유되는 서정적 자아인 <나>의 문제가 본질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해석을 내리면 <아무도 눈치 못 채는 通淫의 이 눈부신 발효!>는 궁극적으로 나의 욕망을 표현한 것이고, <채워도 끝내 차지 않는 허기>조차도 시적 자아인 나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둘째 수의 종장 <게으른 욕망의 곡선이 둔부를 타고 내린다>의 의미는 객관적 상관물인 <옹기첩>에 투사된 시적 자아의 지극히 내밀한 욕망을 표현한 것으로 읽을 수 있다.
<通淫>과 <발효>의 거리만큼이나 대상과 시적 자아는 통합되어 있다. 대상 세계를 끌어들여 이만큼이나 육화시킬 수 있다면 시인은 대상에 대한 주관자이자 창조자로서 역할을 할 수 있다. ‘거리 두고 바라보기’보다는 대상 세계를 나의 중심으로 끌어당기는 힘이 중요한 까닭이다.
이밖에도 봄 시단에서 ‘텍스트 몸 바꿔 입기’라고 명명할 만한 작품으로, 이정환 「너의 肖像」, 선안영 「겹의 시간」, 이달균 「바람 장례」 등이 눈길을 끌었다.
시조단이 문단의 중심을 향해 다가서는 활기찬 약동의 시대가 열리기를 기대하며 이 글을 마친다.
----------------------------------

이민아
1979년 서울 출생. 부경대 국문과 졸업
2007년 <동아일보>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
2005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21세기> 동인
e-mail: loginnow@naver.com

이름:   비밀번호:
 


32
77
295,901